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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

사회주의 민족주의

요즘 사회 현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해결하는 관점을 두고 사회주의란 단어가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흔히 사회주의의 반대는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데 사회주의의 반대는 자본주의이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 또는 전체주의를 말한다.

우리사회에서 사회주의가 받아들여 졌던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자.

3.1운동이 실패한 뒤 민족주의 세력 가운데 일부가 일제와의 타협론으로 돌아서면서 이에 실망한 민족주의자와 젊은 지식층은 민족해방의 새로운 사상으로 사회주의를 적극 받아 들였다.

3.1운동을 통해 자각된 민중의 힘은 이들을 기초로 한 사회주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일제 조차도 이런 현상에 대하여 그동안 독립운동을 거듭함으로써 초조해진 민중에게 사회주의운동은 일종의 자극과 광명을 주었다라고 평가할 정도이다.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은 국외와 국내로 나뉘어져 들어왔는데 일제 강점기에는 지식인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만주와 연해주로 많이 피신해 있던 상황이었다.

일제 시대 사회주의 사상을 먼저 받아들인 것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자였다.

한말 계몽운동을 하다 연해주로 망명한 이동휘와 박진순 등은 1918년 하라로프스키에서 한인 사회당을 결성했다.

민족혁명을 위한 민족 진영과의 연대를 중시한 이들은 정부 통합운동에 적극참여하여 상하이로 가서 19205월에 고려공산당을 결성했다.

이 무렵 이르쿠츠크에서도 러시아 공산당원인 조선인을 중심으로 고려공산당이 결성되었다.

두 공산당은 민족혁명에 대한 이견과 주도권 경쟁으로 대립하다가 결국 192212월 국제공산당인 코민테른의 지시로 해체되었다.

코민테른은 이들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을 극동총국 고려국에 소속시키고 이들에게 조선공산당 건설의 임무를 부여하고 산하 공작원들을 조선공산당 건설을 위해 국내에 파견했다.

한편 국내의 사회주의 수용에는 일본 유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들은 일본과 국내에서 서울청년회,무산자동지회,북성회,신사상연구회 등의 사상 단체를 결성했다.

국내 사회주의자들은 크게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서울파와 1924년 신사상연구회에서 화요회로 이름을 화요파와 경쟁하였고 노동조합,농민조합 등 여러 대중조직을 조직하고 대중투쟁에도 적극 관여 하였다.

조선공산당 건설은 코민테른에서 국내에 파견한 사회주의자와 국내의 화요계가 중심이 되어 은밀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254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창립되었다.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내 사회주의 진영의 유력한 세력이던 서울파가 제외 됨으로써 이후 사회주의 운동이 분열하게 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창립초기부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공동 투쟁을 모색했다.

조선 공산당은 순종의 장례일인 1926610일을 기회로 삼아 제23.1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6.10만세 운동을 준비 했고 19272월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자와 함께 신간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시간이 지나면서 거듭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검거 되거나 나라 밖으로 망명 했다.

초기 공산당 조직의 한계이기는 하지만 지식인이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은 대중에게 뿌리를 내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코민테른은 192812‘12월 테제를 통해 노동자와 농민을 중심으로 공산당을 다시 조직 하도록 지시 하면서 조선공산당은 해체 되었고 이후 해체된 당을 재건하는일이 주요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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