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임진왜란이후에 농업의 큰 변화가 있었는데 농업의 발전과정과 이 과정에서 농민이 일자리를 잃고 도시 노동자로 전라하기도 하였는데 그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자.
조선후기에는 전쟁이후 1/3까지 줄어든 경지를 다시 일구었고 개간으로 경지면적을 늘렸다.
전국의 수리시설이 확충되어 논농사에서 이앙법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논 면적이 절대적으로 많은 경기고,하삼도에 보편화 되었다.
이앙법은 김매기 노동력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지만 가뭄에는 농사를 망치게 된다는 단점도 갖고 있었다.
반면에 적파법은 가뭄에는 강하지만 김매기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이앙법의 장점이 더 크기 때문에 이앙법이 확대 보급되어 생산력이 늘어났으며 다음에 봄 모내기 이전까지 비어 있는 논에 보리를 재배하는 이모작도 가능해졌다.
이앙법이 보급되면서 밭농사에 큰 영향을 미쳐 그루갈이와 견종법이 확대 되었다.
밭작물은 밭갈이로 높아진 이랑에 심는 농종법과 낮아진 고랑에 심는 견종법이 있는데 이 시기에는 거의 견종법을 이용하였다.
견종법은 이랑이 바람을 막고 습기를 머금어서 작물이 추위와 가뭄에 강하여 수확량이 많았다.
그리고 북쪽 지방에서도 보리를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농민들은 쌀을 비롯한 콩·보리·조 등의 곡류 외에 목화와 모시 등의 의류 작물과 인삼·담배·약재 등의 특용작물 가내 수공업으로 만든 물품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러한 농업을 상업적 농업이라고 한다.농업에서 상품생산이 진전되면서 점차 상품마다 특산지가 형성되기 시작 하였다.
개성의 인삼,한산의 모시,안동의 왕골 돗자리 등 지역에 따른 특산품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농업의 발달로 인하여 이전보다 적은 노동력으로 많은 수확을 얻게 되면서 농민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 토지나 차경지를 이용해서 많은 농지를 경영하여 부농이 되기도 하고 상품작물을 재배하여 많은 이익을 얻기도 하였다.
양반지주와 전호농민을 바탕으로 하는 조선사회의 기본 틀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 노비노동을 중심으로 농장을 경영하던 지주들도 작인과 계약에 의해 병작으로 운영하였다.지주의 땅을 부치는 농민이 양반지주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니라 지주와는 경제적인 관계만을 가지는 소작농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양반이건 상민이건 경제력을 갖춘 자들은 많은 땅을 사서 지주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지주제가 확대 되었다.
많은 토지를 가진 자들은 이 시기 적장자 상속에 의해 토지가 집중된 종손이라든가 고관을 역임하면서 많은 토지를 모은 관료 들이다.
하지만 대토지 소유자들이 늘어나면서 많은 농민들은 토지 소유의 규모가 줄어들거나 아예 토지를 잃고 작인으로 몰락하였다.
소작 농민이 많아지면서 소작에도 경쟁이 붙어 경작규모가 줄어들거나 농기구를 갖추고 경작 비용을 지니고 있어야 소작을 얻기가 쉬었다.
소작을 못하게된 농민은 떠돌이 유민이 되거나 품팔이꾼이 되어 도시나 광산으로 흘러 들어가 일자리를 찾게 되었는데 농업 발달이 역설적으로 농민이 농사할 수 있는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