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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실학사상 실학자

실학사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과 실학의 사회개혁에 대하여 알아보자

성리학은 조선후기의 가장지배적인 사상이었다.그러나 성리학은 이 시기 사회변화를 포괄하거나 사회 내부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만한 유연성을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일어나 새로운 학문풍조가 있었는데 1930년대 국학,조선학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되면서 이를 실학이라 명명하였다.

조선후기에 들면 먼저 주자학에서 이탈하려는 경향을 보였다.허목은 송대의 성리학보다 공자,맹자가 살던 시대의 원시유학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

그리고 윤휴와 박세당은 주자의 해석을 부정하여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소론 계통의 학자들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양명학을 받아 들였는데 이는 명의 학자 왕양명의 사상으로서 성리학의 한 흐름이지만 주자와는 다른 해석을 하였다.

양 난을 거치면서 조선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실학이 싹트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이수광,한백겸,유형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실학자 유형원은 일생동안 부안 우반동에 숨어 살면서 독자적인 정치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는데 그 성과를 담은 책이 반계수록이었다.

18세기에 들면서 실학은 여러 학파 내에서 다양하게 꽃피었다.초반에 서울,경기 지역의 남인계 인물들이 주도 하였다.

이를 이끈 인물로 실학자 유형원의 학문을 이어받은 이익을 들 수 있다.그는 광주군 점성촌에서 한평생 학문에 전념하며 대표적인 저서인 성호사설곽우록에서 사회 현실의 각 부분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 하였다.

실학자들이 가장 관심을 많이 가졌던 분야는 농업이었다.토지가 농민의 손을 떠나 지주에게 집중되면서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 졌고 농민을 조세의 원천으로 삼았던 국가의 재정도 큰 타격을 받았다.

실학자들은 토지를 농민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면 지주에게 지대를 내지 않게 되어 농민생활이 나아지고 국가 재정도 충실해 질것으로 기대하였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고대 정전제의 정신을 살려 농민들로 하여금 토지를 균등하게 점유하게 하자는 균전제를 주장하였고 실학자 이익은곽우록에서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정하여 겸병을 방지하자는 한전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실학자 정약용은 여()를 기본단위로 하여 분배하자는 매우 급진적인 여전제를 구상하기도 했지만 뒤에는 점진적인 개혁안으로서 자영농의 경영을 기본으로 하는 정전제를 주장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농업경영에 뛰어난 농민들을 지방이나 중앙의 관리로 뽑아 정치에 참여시키도록 하여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였다. 그 밖에도 경세유표를 통해 국가제도 전반에 걸친 개혁을 내세웠다.

실학자 들은 상업발전과 대외무역이 오히려 생산을 자극하고 발달한 선진기술을 받아 들일 수 있게 하므로 국가가 상업발전을 뒷받침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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