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갑신정변은 민중의 마음을 달래지 못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여서 실패하였다고 하는데 갑신정변의 3일 천하에 대하여 알아보자.
1882년 군인봉기를 진압한 청은 조선이 속국임을 내세워 조선 내정에 간섭했고 이에 따라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민씨 일가 들은 친청화하면서 개화정책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이 때부터 정부안에서 개화정책을 두고 분열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동도서기론인 개화파(온건개화파)는 수구적인 민씨 일가와 손을 잡고 청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점차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반면에 김옥균,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는 이에 불안을 느끼고 개화를 더욱 서둘렀다.
이들은 1882년 후반 미국 등을 대상으로 개혁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고자 차관 교섭을 벌이고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견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한성순보』의 발행,서울의 도로 정비 등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해 나갔다.
이에 민씨 일가들은 이들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면서 차츰 정부요직에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어려운 국가재정을 충원하는 방법을 두고 김옥균과 묄렌도르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위안스카이가 데려와 공조 참관에 앉힌 최초의 외국인 이었다.
묄렌도르프는 당오전의 발행을 주장하였으나 김옥균은 차관을 들여와 해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단순히 재정 문제가 아니라 개화 방안의 주도권을 둘러싼 급진 개화파와 온건개화파의 갈등이었고 결국은 청의 방해로 차관교섭이 실패하면서 급진개화파는 정치적 곤경에 처 했다.
그런데 1884년 안남 문제를 두고 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조선에 주둔한 청군의 절반이 철수하면서 일시적으로 청의 약화되었다.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는 이를 기회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급격한 개혁을 하지 않으면 국가의 자주와 독립을 지킬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정변을 준비하고 일본도 조선에서 청에 대한 열세를 만회할 속셈으로 정변을 돕겠다고 나섰다.
1884년 10월 17일 김옥균 등은 우정국 낙성식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자체 무장력과 일본군을 동원하여 민씨 일파를 단숨에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정변에 성공한 개화파는 10월 19일 개혁 내용을 담은 14개조 정강을 발표했다.
정치적으로 청에 대한 사대외교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적 정치구조를 내세우고 경제적으로 지조법을 개정하고 재정기관을 일원화하여 국가재정을 충실히 하고 개항 뒤 보부상의 독점권을 보장한 혜상공국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 발전을 꾀하려 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인민평등권과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으로 정치 참여의 기회를 넓히고자 했다.
그러나 정변은 3일 만에 끝났다 10월 19일 오후 청군이 공격 해오자 지원을 약속한 일본군이 철수해 버렸다.
일본은 청과 충돌하는 것이 시기 상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화정책에 피해를 본 서울의 상인과 빈민들도 강한 적대감을 품고 개화를 공격했다.
결국 홍영식 등은 청군에게 죽음을 당하고 김옥균,박영효,서재필 등 9명이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갑신정변은 일본의 침략속셈을 내다보지 못한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이 정변이 실패한데는 이들의 혁명을 뒷받침할만한 사회적 역량이 성숙되지 못했고 민중의 사회개혁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한데 원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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