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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홍경래의 난

19세기 대표적인 민중운동인 1811년 일어난 홍경래의 난에 대하여 알아보자.

홍경래의 난은 탐관오리의 횡포와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대우 그리고 연이은 가뭄과 질병에 의해서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홍경래의 난의 무대였던 평안도는 조선후기 경제적으로 매우 발전한 곳이었다.

청과의 대외무역 통로로서 평양,의주,안주의 상인들이 대외무역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광산과 금속가공업도 일찍부터 발달하였는데 청과의 무역에서 은의 수요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은의 채굴이 급속하게 늘어났고 금광도 개발되었다.

대표적으로 납청 장시와 박천의 놋그릇 수공업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점차 공장제수공업으로 변모 하였다.

반면에 서북지역은 정부의 지역적 차별로 인해 사족층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상품화폐경제에 따라 성장한 부민층들은 그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누르는 중앙의 간섭과 제한 그리고 지나친 수탈에 불만이 컸다.

또 이곳의 광산이나 수공업장에서 일하는 임노동자들도 농촌에서 몰락하여 도망치 자들이엇서 지배층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여기에다가 서북민에 대한 지역적 차별은 그들에게 공통적인 피해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은 몰락양반 홍경래를 비롯하여 서얼 출신 우군칙,천민으로 금광경영과 상업으로 돈을 모은 이희저,빈농출신 김사용,곽산의 진사 김창시 등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3~4년 전부터 가산군 다복동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광산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구실로 유민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키고 힘이 좋은 역사들을 중심으로 지휘관을 정하여 봉기군을 구성하였다.

또 상인이나 광산주를 동원하여 무기,군복,군량 등을 갖추기도 하였고 평안도 각 고을의 아전 향임 등을 끌어들려 봉기가 일어나면 함께 하기로 하였다.

1811년은 전국적으로 큰 흉년이 든 해였다.홍경래를 평서대원수로 하여 다복동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남진군이 가산,정주,박천을 그리고 북진군이 곽산,선천,태천,철산,용천을 손에 넣었다.

홍경래 난을 접한 조정에서는 급히 토벌부대를 파견하였으며 평안도 병영군이 중심이 된 관군은 안주를 중심으로 집결하였다.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가운데 홍경래 군은 박천에서 크게 패배하고 정주성으로 후퇴하였다.

정주성은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4개월을 버티다가 18124월 관군이 정주성에 땅굴을 파고 성벽을 무너뜨려 함락시켰다.

이 홍경래의 난은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면밀한 계획과 장기간의 준비를 거쳐 조직적으로 전개된 무장봉기 였다.

홍경래난의 중심은 상품화폐의 발달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부민층이었다.이들은 재력을 바탕으로 지역에서 향임직을 차지하여 신향층을 이루었다.

이들은 중앙과 긴밀히 연결되었던 수령들의 수탈과 서북민에 대한 차별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향권을 장악하여 수령권을 배제시키고 부민층에게 가해진 수탈을 막는데 목적이 있었다.그래서 소빈농층의 이익을 대변하지는 못했다.

다만 농민들과 농민 출신의 역사들이 봉기에 큰 동력이 되었으며 정주성에서 마지막으로 농성할 때에도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

이 홍경래난으로 인하여 사회 불안이 더 고조 되었고 1862년에 임술민란으로 전국적으로 농민의 항거가 확산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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