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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동도서기론과 급진개화파

조선후기 개화의 방법을 두고 청의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는 온건개화파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바탕으로 급진적으로 개혁 하여야 한다는 이론이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들의 내용에 대하여 살펴보자.

조선 후기 북학파의 중상주의적 사상을 적극 받아 들인 개화사상은 1860년대 조선사회가 맞닥뜨린 안팎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여기에는 1850연대 북학파를 이끌던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중인 출신의 통역관 오경석과 그의 친구 유흥기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박규수와 오경석은 1850년대부터 사신을 따라 중국을 드나들면서 서구 문물을 접하고 구미 열강의 침략 앞에 허물어지는 중국을 목격했다.

이 들은 이과정에서 시대에 뒤 떨어진 조선사회의 현실을 깨달았다.오경석은 친구 유흥기와 함께 이 문제를 논의 하면서 언젠가는 조선에 일대혁신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여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 들여 부국강병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들은 박규수와 함께 세도가문 출신의 진취적인 젊은 청년인 김옥균,박영효,박영교,홍영식,서광범,김윤식 등을 모아 자신들이 중국에서 터득한 견문과 서구 문물을 소개한 책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상을 가르쳤다.

이들은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정세의 흐름,서구 문물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여 조선사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개화 방법을 두고 차이가 있었는데 김윤식,신기선 등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으로 조선의 윤리와 도덕을 유지하면서 서양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했다.

이들은 서양의 도덕과 기술을 분리하여 조선에 이익이 되는 기계 제조법이나 농업과 임업 등에 관한 좋은 기술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입장이었다.

개화방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문호개방이후 고종의 개화정책에 적극 참여하여 같은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1882년 군인 봉기 뒤 청의 내정간섭으로 개화정책이 후퇴하면서 이들은 동도 서기론과 급진개화파로 나뉘어 정지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과 청의 침탈이 강화 되면서 개화의 방법을 두고 두 입장으로 나뉘었다.

청의 양무론과 비슷한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은 부국강병을 위해 개화정책을 실현하되 민씨 일족과 타협하면서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서양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여 점진적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청과도 종래의 사대관계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김옥균,서광범,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근대화 모델로 삼고 서양의 과학기술 뿐 만아니라 사상이나 제도 까지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민씨정권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고 조선을 내정 간섭하는 청과의 사대외교의 종식과 자주독립을 강조 하였다.

급진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을 꾀하다가 실패했고 동도서기론은 대한제국 성립이후 고종이 실시한 광무개혁의 원칙인 구본신참을 계승 하였다.

동도서기론과 급진개화파는 궁극적으로 부르주아적 개혁을 지향한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이었다.

동도서기론은 동도를 지키면서 서기만을 받아 들인다는 다는 주장을 하지만 서기에는 서양의 정신,사상인 서도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서기와 동도를 구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한계가 있었다.

또한 전면적 서구화를 내건 급진개화파의 주장 역시 근대문물을 앞세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성을 깨달을 수 없는 논리적 한계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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