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부여 삼한

삼국시대 이전에 나타난 부여와 삼한의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자.

고조선의 뒤를 이어 나타난 국가가 부여이다.부여는 중국길림지역을 중심으로 송화강 유역에서 일어났다.길림지역은 일찍부터 청동기 문화가 발전한 곳이었다.

비파형 동검과 동모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곳 청동기 문화는 서단산문화라고 불리며 고조선이 요동지역의 청동기 문화와 긴밀한 연관성을 보이고 있다.

부여는 청동기 문화의 기반위에 철기문화를 받아 들여 성장하였는데 부여가 자리 잡은 만주평원은 농경과 목축이 유리한 여건으로 물산이 풍부하여 많은 인구가 자리잡고 살 수 있는 곳이었다.

부여는 왕 밑에 마가,우가,저가,구가라는 대가들이 연합한 형태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대가들은 사출도라는 독자적 지배 영역을 가지고 있었고 왕도 자신의 지배 영역을 기반으로 정치를 하였다.왕이 실정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대가들의 회의에서 왕을 교체할 정도로 대가들의 힘은 강하였다.

부여에서도 고조선처럼 엄격한 법이 시행되었는데 살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으며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였다.

투기를 규제한 법을 통해 남성중심의 가부장제가 확립되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중국역사서에 부여는 예의를 아는 나라라고 전하는데 그것은 한과 그 이후 중국 여러 왕조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우호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부여는 285년 선비족의 침략으로 부여의 수도가 함락되고 왕은 자결하였으며 지배층 딜부는 두만강 유역으로 피신했다.이후로 부여는 쇠퇴하여 4세기 중엽 전연 군대의 급습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부여는 삼국 가운데서 고구려와 백제의 왕실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전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삼한은 기원전 2세기 초 고조선의 준왕이 바다를 건너 한()으로 가서 왕을 칭했다고 한 기록이 있다.준왕 세력은 전라북도 익산 일대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조선 사회의 변화에 따라 많은 유이민이 남하하면서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도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곳곳에 철기제작과 교역의 중심지가 생겨났고 선진 문화를 가지고 한반도 서북부에서 내려온 이주민 들이 토착세력과 융합하면서 새로운 정치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벼를 비롯한 곡식 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생산력이 높아 졌다.

삼한은 여러 개의 소국들이 연합하여 마한,진한,변한으로 나뉘어 낙랑군,대방군 등과 활발히 교류하며 성장하였다.

마한은 물산이 풍부하고 바다를 통한 중국 군현과 쉽게 교통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진한과 변한은 철의 생산이 풍부하였고 진한과 변한은 마한과 예맥은 물론 바다 건너 낙라,대방,왜와도 교역하였다.

삼한 단계에서 한반도 전역이 본격적으로 철기문화 단계로 진입하였는데 철기문화의 확산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회를 출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마한은 백제에 통합되었고 진한은 사로국에 통합되었다.그리고 변한은 각 소국이 독립국가의 형태를 보이며 연맹체을 이루며 발전하게 되었다.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시과 제도  (0) 2021.01.13
통일신라와 발해  (0) 2021.01.12
동도서기론과 급진개화파  (0) 2021.01.10
동학농민 운동 갑오개혁  (0) 2021.01.09
홍경래의 난  (0) 2021.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