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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동학농민 운동 갑오개혁

갑신정변이 위로부터 아래로의 개혁이라면 동학농민 운동은 아래로부터 위로의 개혁이다.

동학농민운동과 이를 통한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의 농민항쟁에 대하여 알아보자.

조선은 개항이후에도 지방관리 들의 농민에 대한 수탈이 이어졌고 일본에 쌀이 수출되고 자본제 상품이 수입되면서 쌀값이 크게 뛰었고 영세수공업자와 영세상인 등 민중의 삶이 날로 어려워 졌다.이에 따라 전국에서 농민들의 항쟁이 이어졌다.

농민들의 반봉건 항쟁은 1890년에서 189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봉기의 주도층이 부농에서 소농,빈농층으로 옮겨 갔고 봉기 발생지역도 함경도에서 관서와 삼남 등 전국적으로 확대 되었다.그러나 농민 항쟁은 거의 군현 단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대개 일회성에 그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농민들은 전국적 항쟁을 벌일 만한 이념과 조직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동학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학은 1864년 교조 최제우가 처형되면서 불법화 되었지만 빠른 속도로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각지에 조직된 동학의 포·접과 같은 조직은 지역을 초월하여 농민을 하나로 묶어 주는 역할을 했다.

정부와 양반 지배층이 동학교도를 더욱 탄압하자 동학 간부들은 탄압을 중지하고 억울하게 죽은 교주 최제웅의 명예를 회복해 다라고 교조 신원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교조신원이 탄압만 받고 실패로 돌아가자 보은 장내리에서 대규모 보은집회를 열었고 전라도 금구 원평리에서는 전봉준과 황하일이 주도하는 1만여명의 농민 집회 금구집회가 열렸다.

금구집회 이후 전봉준 등 동학 지도자들은 세력을 키워나가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당시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는 개항 뒤 쌀이 일본으로 수출되면서 일본상인들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의 수탈이 가장 심한 곳 가운데 하나였다. 때문에 이곳에는 언제라도 농민 봉기가 일어날 강경한 기운이 감돌았다.

전봉준 등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농민들의 원망이 높아지자 189311월 봉기를 준비 했다.

이 계획은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발령 나면서 일단 무산이 되었다. 그런데 조병갑이 뇌물을 써서 고부 군에 다시 눌러앉게 되자 고부농민들은 더 이상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1894110일 새벽 전봉준은 농민들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점령하여 조세장부를 불사르고 감옥 문을 열어 죄 없는 백성들을 풀어주었다.

또 양곡을 몰수하여 억울하게 빼앗긴 농민에게 돌려주고 원망의 대상이던 만석보를 부수었다.

그러나 낌새를 챈 조병갑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고부민란).

전봉준은 농민군을 다시 정비한 뒤 백산으로 물러나 사태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32일 봉기를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는 오히려 모든 책임을 동학 탓으로 돌리고 죄 없는 농민들을 동하교도로 몰아 이들을 탄압했다.

이어서 전봉준이 1894320일 손화중,김개남 등과 함게 전라도 무장에서 다시 봉기함으로써 제1차 농민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봉준은 보국안민의 깃발을 앞세우고 25일 백산에서 서울로 진격하여 탐관오리를 징치하고 와래 침략자를 내쫓는다는 격문을 발표하고 26일 백산을 떠나 태인을 거쳐 금구 원평에 진을 쳤다.

농민군이 봉기 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해진 정부에서는 농민군을 토벌하도록 했다.이 무렵 황토현에 진을 친 농민군은 전라감사 김문현이 파견한 감영군을 야간에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전투가 황토현 전투이다.이어서 농민군은 장성 황룡촌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300명의 중앙군 선발대를 또 물리쳤다 이 전투는 황룡촌전투이다.

이 여세를 몰아 진주성을 점령하였다.이에 놀란 조정은 황급히 청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였다.이에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청과 일 양군이 마주하게 되었다.

조선에서 일본군과 청군이 무력 충돌하는 민족적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농민 군은 58일 정부군과 전주화약을 맺었다.

전주성에서 물러난 농민군은 정부 측에 전주화약에서 약속한 폐정개혁을 거듭요구하며 각종개혁을 실시하고 감독했다.

그러나 18948월 평양전투에서 청을 크게 물리친 일본은 친일 갑오정권을 내세워 내정간섭을 강화했고 친일 갑오정권은 일본군에게 농민군의 토벌을 요구했다.

이에 농민군은 또다시 일본의 침략에 맞선 대규모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농민군과 일본군의 가장 치열한 전투가 우금치 전투였다.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농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부대를 해산하게 되었다.

결국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처형되어 1년간 지속된 농민전쟁은 큰 희생을 치른 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농민전쟁은 비록 좌절되었지만 반봉건 근대화와 반침략 자주화를 통한 근대 민족국가의 수립을 지향한 변혁운동 이었다.농민전쟁은 위로는 갑오개혁의 추진력으로 작용했고 아래로는 대한제국기의 농민항쟁으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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