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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려의 대외관계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고 체제를 정비하는 동안 중국에서는 당이 망한 뒤 여러 나라의 흥망이 교체되었다.

고려를 둘러쌓고 있던 거란,여진,송나라와의 대외관계에 대하여 알아보자.

중국 북방에서 거란족이 큰 세력을 이루어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자 발해의 유민들이 대거 고려로 등어 왔다.태조 왕건은 이들을 받아들이고 거란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후 거란은 938년 국명을 요하고 한 뒤 세력을 확장해갔다.

요는 중원 침략에 앞서서 여진과 고려를 공략해 배후를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96년 송이 다시 중원을 통일하였다.고려는 962년 송과 처음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요의 세력 확대에 위협을 느낀 소은 985년 고려에 연합공격을 제의 하였다.그러나 고려는 송의 요국에 따르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출병하지 않았다.

아직 내부의 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여야 할 형편이 이었고 그동안 거란의 위협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93년 요의 장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여진족이 요의 출병 소식을 알렸지만 고려는 이를 무시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침략한 소손녕의 군대가 80만이라는 소식을 듣고 요의 요구를 들어주자고 하였으나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으로 전쟁을 피하고 강동6주를 새로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를 계승했고 고구려의 옛 땅은 거란의 것이라고 주장하자 서희는 고구려의 후손은 고려이고 거란 땅도 사실은 고려 땅이라고 답했다.

또 요와 교통하지 않는다는 비난에 중간에 여진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며 그 땅을 되찾는다면 국교를 맺을 것이라고 하였다.그리고 요의 침략 목표가 고려가 아닌 여진임을 간파하고 서희는 여진을 협공하겠다고 제안하였는데 소손녕이 흔쾌히 받아들이고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땅 강동 6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1010년 강조의 변을 구실로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면서 요가 침입하였으나

양규의 활약으로 잘 막아냈다.

이후 고려 현종 때 요의 3차 침입이 있었으나 강감찬 장군이 귀주에서 대승을 거둬 요나라는 철수 하였고 요는 침략 전쟁을 그만두고 고려와 화친을 맺었다.

요의 침략을 물리친 뒤로 1세기 동안 평온하였다. 그러나 11세기말 여진이 큰 세력을 이루면서 평화는 깨어지게 되었다.

윤관이 별무반을 편성하고 여진을 토벌하여 9성을 축조 하였다.여진은 1115년 부족을 통합을 이루고 건국하여 금이라고 했다.세력을 확대해 강대국이 된 금이 사대를 요구하자 고려는 1126년 군신관계를 맺었다. 그 결과 고려는 더 이상 금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

금은 1122년에는 요를 멸망시키고 만주와 중국북부 지역을 차지한 강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송나라도 공격하였는데 이 침략으로 남쪽으로 밀려난 송은 금황제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막대한 세비를 바치는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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