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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과전법 전세제도

고려의 전시과에서 고려말 등장한 과전법의 특징과 전세제도에 대하여 알아보자.

과전법은 조선건국의 주도세력이 고려 새로운 국가건설의 일환으로 사전개혁을 단행하면서 시행한 제도이다.

전국의 토지를 국가수조지로 편성하고 이를 각급기관과 관료,왕족,지방의 유력자에게 토지세를 받을 수 있는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각급기관에서 지급한 것은 공전이고 개인에게 지급한 것은 사전이다.그러나 고려 말 사전확대와 토지겸병 등과 같은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사전은 경기지역에 한하여 분급하였다.

문무 관리들은 18등급으로 나뉜 관직에 따라 최고 150결에서 최저 10결까지 분급받았다.수조율은 1/10으로 한정하여 수조권자가 농민을 함부로 수탈하지 못하게 하였다.

수조권이 설정되어 있었지만 토지에 대한 실질적인 소유권은 따로 있었다.특히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은 사전보다 공전에서 더욱 안정적이었다.

과전법은 토지의 종류를 공전과 사전으로 구분하여 사전은 경기 지역을 대상으로 하였다.

고려의 전시과와 조선의 과전법의 차이점이 전시과는 전지(과전))와 시지를 전국적 규모로 지급하였으나 조선의 과전법은 전지(과전)만 경기에 한하여 지급하였는데 이는 중앙집권과 재정 확보를 위해서 하였고 과전법은 농민의 경작권이 법적으로 보장 되었다.

사전의 경우도 전주의 횡포에 대해 농민이 자신의 토지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국가가 보호하는 조치를 취하였다.그러나 사전은 여전히 사전주들이 직접 조세를 거주면서 액수를 늘려 받거나 마치 자기토지인 것처럼 농민들에게 간섭하는 등 폐단이 컸다. 농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국가는 차츰 사전주들의 권리를 제한하였다.

원칙적으로 국가에 큰 공을 세운 대가인 공신전을 빼고는 자손에게 사전을 물려줄 수 없게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거의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폐단이 있었다.

따라서 세조 12년 현직자 들에게만 토지를 나눠주는 직전제도를 만들어 이를 방지하려고 하였다.그런데도 수조의 권리를 이용하여 농민들로부터 함부로 조세를 걷고 수탈하는 폐단이 계속도자 관에서 직접 농민들로부터 조세를 걷고 관리에게 나눠주는 관수관급제를 시행하게 되었다.그 뒤 직전이 있는 관리에게도 토지 지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왕조가 개창되면서 과전법과 긴밀한 전세제도 또한 새로 정비되었다.

처음 과전법이 시행 될 때는 담험손실법이라고 하여 답험관인 향리,토호들에 의해 농작 상황에 따라 차등을 두어 전세를 결정하였다.그러다가 이들의 중간 부정이 극심해지자 토지의 생산성에 따라 정확히 대응하여 조세를 부과 하여고 오랫동안 노력한 끝에 공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공법에서는 전국의 논밭을 비옥도한 정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1결씩의 면적 차이를 두었는데 이를전분6등급이라고 하였다.

토지세는 1결 수확량의 1/20에 해당하는 20말로 정하였다.

또 그해 농사의 풍흉 정도에 따라 9등급으로 세율을 조정하는 연분9등급도 시행되었다.

공법은 토지의 등급을 세분화하고 군현 단위로 그 해의 풍흉에 따라 조세 부과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이를 시행하기 위해서 전국 각도의 수 많은 의견을 수렴하였다는 점도 이 제도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러한 공법의 시행은 양전이라는 토지조사를 통해서 토지에 대한 파악이 늘어났기에 가능했다.세종 때에는 전국의 토지가 172만결로 늘어났는데 고려 말보다 2.5배 정도 많은 수치이다.

양전은 20년마다 시행하도록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힘과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실제 이를 지키기는 어려웠다.그리고 양전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는데 지주의토지는 실제보다 낮은 등급이 매겨지고 농민의 토지에는 높은 등급이매겨지는 등의 폐단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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