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으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의 직책에 따라 무덤도 구분되는데 왕릉과 일반 묘의 구분에 대하여 알아보자
무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기를 바라는 영혼불멸의 신앙 위에서 시체를 매장하였던 풍습에서 만들어진 유물이다.
무덤은 이미 신석기 시대부터 생겨났으며 그 뒤 여러 가지 형태로 분묘를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무덤 속에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에는 다리를 구부리는 굴신장과 다리를 곧게 뻗은 신전장의 두 가지가 있으나 한국에서는 신전장만 시행되었다.
그리고 대개는 머리를 동쪽에 두고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하였는데 이를 동침신전앙와장이라고 한다.
묘의 주인을 알 수 있을 때는 능(陵),원(園),묘(墓)로 구분되며 주인을 알 수 없을 때는 총이나 분으로 구별된다.
능은 왕이나 왕비를 나타내는 무덤을 뜻하고 원은 세자와 세자비,왕의부모를 나타내는 무덤을 말하고 묘는 그 이외의 모든 이의 무덤을 뜻한다.
그러나 능,원,묘의 구분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고 조선후기 이전에는 왕릉인 능과 일반적인 무덤인 묘의 두 가지 구분밖에 없었다.
원에 세자비나 왕의 부모를 모시는 형태는 조선시대 인조 때 처음 등장하였다가 영조이후에 일반화 되었다.
능,원,묘가 비교적 무덤이 조성된 당시에 붙여진 이름인 데에 비해 총이나 분은 무덤이 조성된 이후 후대인들에 의해 발견되어 붙여진 명칭이다.
총은 다른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특이한 유물이 발견된다든지 다른 무덤과 차별화 되는 점이 있을 때 붙이는 이름이며 당시 지배세력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천마총은 그곳에서 천마도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무용총은 그곳에서 천마도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분은 총에 비해 특징이 없는 평범한 무덤을 말한다.이런 무덤의 경우 고분군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체로 안악 몇호분,대성 몇호분 하는 식으로 무덤이 위치한 동네와 고유번호 이름을 정한다.
처음 무덤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집근처의 땅속이나 조개더미에 묻었으며 봉토도 하지 않았다.이때 돌을 이용하여 무덤을 꾸미는 방법이 쓰이기 시작하였는데 최초의 것은 뚜껑도 바닥도 없이 자연석을 직사각형으로 둘러 세우고 그 속에 시체를 안치한 환석묘이다.
그 뒤에 몇 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났는데 고인돌이라고 불리는 지석묘와 판석과 괴석으로 관을 만들어 흙 속에 묻는 돌널무덤이 나타났다.
그리고 판석으로 만든 관 위에 흙 대신 돌을 쌓아 올린 돌무지무덤과 지하에 수직으로 직사각형의 구더이를 파고 시체를 묻은 널무덤이 있었고 두 개의 항아리를 맞붙여 관을 만든 독무덤 등이 있다.이가운데 가장 널리 분포하는 것이 지석묘의 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 왕릉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임금이 존재하였던 시기에 조성되었다.
삼국의 왕릉 가운데 현재 고구려와 백제의 왕릉은 거의 확인되지 않거나 현존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고구려나 백제의 왕릉이나 묘가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대부분 파괴당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그에 비해 신라의 왕릉은 상대적으로 많이 밝혀져서 신라의 임금56위 가운데 37기의 능묘가 확인 되었거나 추정되었다.
통일신라의 왕릉은 당나라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 장식이 화려하고 고려의 왕릉도 통일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주로 개성과 그 부근에 조성되었다.그리고 조선왕조는 왕릉을 서울의 주변에 지속적으로 조성하였고 왕릉의 양식은 일반관료나 사대부의 분묘에도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