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백두산 정계와 정계비 지도

 

백두산 정계비도는 백두산 정계비와 백두산에서 흐르는 물 줄기에 관한 1712년 당시의 인식을 보여준다.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청나라와 조선의 입장에 대하여 알아보자.

지도를 제작하는 목적이 정치적 · 군사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조선시대에 제작된 고지도들 가운데 당대의 정치적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은 관방지도다. 관방이라는 말은 변경을 방어한다는 의미다. 일찍이 최남선은 조선이 주변에 강대국을 끼고 있어서 국방상 국경지대의 지리 파악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지도를 많이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옛날에도 국방과 지도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관방지도의 역사는 고대로까지 소급되지만,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관방지도들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관방지도 중에는 1712년 정계비가 세워지던 시절의 사정을 보여 주는 것도 백두산정계비도가 있다.

이 지도에 정계비는 강원비라는 이름으로 적혀 있으며, 백두산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별도로 표시되어 있다. 백두산에서 동류하는 물줄기는 대각봉을 지난 뒤 땅속으로 흐르기 시작하는데, 지도 상에서 入地暗流라고 되어 있는 곳이 그 자리다. 복류(伏流)하던 물줄기는 감토봉 부근에서 다시 솟아나는데, 이 지점에는 水出이라는 표시가 있다.

청나라 측 책임자인 목극등은 토문강이 땅 밑으로 흐르는 지점을 다시 살피게 하고는 조선 측 실무자인 박권에게 글을 보내 그곳에 목책을 세울 필요가 있는지 물었다. 박권 등은 흙담이나, 돌무덤, 나무울타리 등을 쌓는 방안을 제안하고, 이 공사를 청나라에서 감독할 의사가 있는지 되물었다. 목극등은 조선이 임의로 시행한 뒤 사신이 통보해 주는 것으로 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사를 주관한 허량은 목극등이 지정한 수원이 아니라 새로 발견한 수원으로 연결되는 표식을 세웠다.

정계 이전부터 조선과 청의 판도는 두만강을 경계로 하고 있었지만, 정계과정 자체는 불투명하기 짝이 없었다. 목극등이 지정한 수원이 실제로는 두만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물길이 끊어진 곳에 나무울타리를 쌓는 과정에서 이미 확인되었다. 게다가 울타리 설치과정에도 적지 않은 혼선이 있었다.

정계비 설치 후 조선에서는 토문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일었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대해서도 다양한 추정이 생겨났다. 어떤 지도에는 두만강과 별개의 강으로 토문강이 그려지기도 했고, 다른 지도에는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온성부 부근에서 두만강에 합류하는 분계강이 묘사되기도 했다. 토문이 두만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 우세해지면서 선춘령이 두만강 이북에 있다는 조선 초기의 역사의식도 되살아났다.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국시대 한강을 차지하려는 이유  (0) 2021.11.06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 토기  (0) 2021.07.10
불교 석조미술  (0) 2021.04.06
대한제국 광무개혁  (0) 2021.03.17
예송논쟁과 환국  (0) 2021.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