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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이황 이이

 

16세기 들어 유교 윤리가 심화되면서 향촌사회의 및 가족에서의 생활상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유교적 생활상을 강조하면서 이에 따른 생활 윤리가 사족들 사이에서 정착되었는데 이 역할을 주도적으로 한 이황과 이이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황은 재지사림의 교육에 치중하면서 장차 향촌사회를 주도 할 수 있는 적극적인 교학체계를 확립하는데 주력하였다.이황은 인간의 도덕적 실천의 근거인 ()’의 능동성을 강조하여 주리론의 입장을 취하였다.반면에 이이는 만언봉사(萬言封事)를 비롯한 수 많은 상소를 통해 성리학자로서는 드물게 사회문제를 개혁하는데 강한 관심을 표명하였고 이이는 민은 교화하기에 앞서 경제적으로 길러야 하고 경제적으로 기르기에 앞서 시폐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황은 호가 퇴계이며 1501년에 태어났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곧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상복을 입었다. 삼년상이 끝나고 관직에 복직할 시점은 김안로가 득세하기 시작 한 때였으므로, 이황은 관직 생활에 뜻을 접고 154640대 중반의 나이에 향리고 퇴거하여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 후 잠시 지방의 수령직을 맡았는데 경상도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니, 이것이 조선왕조 최초의 사액서원이었다. 명종은 이황의 명성을 듣고 그리워하여 여러 차례 명소하였는데, 1552년 성균관대사성에 오른 것을 제외하고는 여러 차례 관직을 사양하였다. 그런데 1567년 부름에 응하여 서울로 갔을 때 명종이 급서하고, 선조가 즉위하였다. 이 시기 이황은 잠시 서울에 머무르면서 경연을 맡고,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지어 바쳤다. 그리고 낙향한 다음해인 1570년 숨을 거두었다. 시호는 문순이고, 문집으로 퇴계전서가 있다. 그 의 제자들은 경상좌도 일대를 중심으로 학맥을 이어 갔으며 대부분 남인에 속하였다.

이이는 1536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숙헌, 호는 율곡 등이다. 23세 때 이황을 방문하였고 그 해 겨울에 별시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는데,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이이가 관직에 나갔을 무렵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제거되었으며, 얼마 있지 않아 선조가 즉위하였다. 이이는 30대와 40대 동안 활발한 관직 활동을 하였으며, 이러한 현실경장의 태도는 그의 형이상철학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와 기는 불상리불상잡 하다는 그의 입장은 이황의 순선한 이를 강조하는 입장과는 차이점이 있었다.

이이는 1584년에 사망하였는데, 시호는 문성이고 문집으로 율곡전서가 있다.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은 거의 구분되지 않고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는데 이들이 거의 서인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황과 이이는 조선 성리학을 새로운 경지로 이끌어 올렸다. 특히 이황과 기대승 사이에서 벌어졌던 사단칠정 논변은 당시 조선 성리학의 발전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주제로 이이와 성혼 사이에서도 인성론에 대한 논변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논쟁들은 조선이 성리학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철학적 주제들을 사고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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